♧기 타 글♧

[스크랩] 보길도와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완도 보길도)

우리둥지 2007. 6. 11. 12:05





보길도 예송리 해수욕장 & 우암 송시열 글씐 바위 전경

(2006/08/13 현재)





토말 전망대 & 포구 입니다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보길도 청별 포구 입니다 








보길도 망끝 전망대 입니다 







보길도 뽀족산 입니다 







보길도 예송리 해수욕장 입니다 













보길도 송시열 글씐 바위 전경 입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詩烈)
 
    우암의 일생
 조선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 호는 우암.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선조40년,1607년) 26세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나, 후에는 회덕으로 옮겨가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 <기묘록> 등을 배우면서 주자,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이 무렵부터 충청도 연산의 김장생에게 나아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고 27세 때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최명길의 추천으로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생활은 뒷날 효종이 된 봉림대군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봉림대군 만16세, 우암 만28세) 그러나 병자환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그는 좌절감 속에서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 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관직을(사헌부장령) 주어 불렀으므로 그는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으나(42세) 7일만에 벼슬을 떠났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시강원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해 5월까지 역임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의 복제문제로 예송이 일어나고, 왕비의 아버지인 김우명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져 낙향하였다. 인조 11년(1633년) 27세 때부터 사망하는 숙종 15년까지 56년에 걸쳐 네 임금이 부른 횟수는 167회였으나 이에 응한 것은 37회에 불과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9)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그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고,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장기 거제 등지로 유배되었다. 유배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1689년 1월 소의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봉하여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는데, 이때 그도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에 내려졌다. 다음해에는 문정이라는 시호라 내려지고 이때부터 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 23개의 서원과 전국 9개소의 사우에 제향되었다. 영조 31년(1755)에는 드디어 유학자 최대의 영예인 문묘에 종사되었다.
 
   우암의 개인적인 삶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삶을 산 인물이다. 소학은 평생에 걸친 수신교과서이다. 그는 검소함을 으뜸으로 삼아 조복도 비단이 아닌 무명을 사용하였으며 망건에 금관자도 달지 않았고, 부모가 생전에 가난하여 요도 없이 지낸 일이 있다 하여 평생 요를 깔지 않았다고 전해질 정도의 효자였다. 가정에서도 효도는 그에게 성인의 도, 그 자체였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중형을 아버지 섬기듯 하면서도 두 아우에게는 우애와 엄정함을 가르쳤다. 또 부인에 대한 예우는 깍듯해 며칠이상 외출시 부부가 서로 절하고 귀가할 때도 절하였다고 한다.
  
  글쓰여진 바위
 
 보길도의 맨 동쪽 끝 해변에 있고 남쪽으로 넓게 펼쳐진 바다가 수평선으로 이어져 있으며, 바로 앞은 소안도가 보이고 수평선 쪽에서 제주도가 시야에 들어온다. 주변의 경관은 20~30m의 높은 절벽이 약 300m까지 이어져 있으며, 절벽 위에는 해송이 울창하다. 이 절벽의 한 부분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정치가 였던 우암 송시열의 마지막 시를 후세에 음각으로 남겨 놓았다.
 조선 숙종15년(1689년) 때 왕세자 책봉 문제로 당파간에 논쟁이 심화되었고 우암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를 명하게 된다. 유배길에 오른 우암 송시열은 보길도를 지나다 한시 한 수를 지었는데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의 시다. 석벽에는 시 2수가 음각되어 있는데 한 수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것이고, 한수는 임관주(任觀周)작으로 추정이 된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모진 사람들의 손에 의한 탁본의 흔적 때문에 잘 알아보기가 어렵다.
 
八十三歲翁(팔십상세옹) 83세 늙은 이 몸이
蒼波萬里中(창파만리중) 거칠고 먼 바닷길을 가노라
一言胡大罪(일어호대죄) 한 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三黜亦云窮(삼출역운궁) 세 번이나 쫓겨가니 신세가 궁하구나
北極空瞻日(북극공첨일) 북녘 하늘 해를 바라보며
南溟但信風(남명단신풍) 남쪽 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 뿐이네
貂舊萬恩在(초구만은재) 초구(임금이 하사한 담비 갖옷)에는 옛 은혜 서려있어
感激泣孤衷(감격읍고충) 감격한 외로운 속마음 눈물 지우네.
고산과 우암의 정치역정  
구 분
고산
우암
출 생
선조20년(1587년) 서울 동부 연화방에서 출생
선조 40년(1607년) 충청도 옥천에서 출생
사 망
85세(1671년현종12년6월11일)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芙蓉洞樂書齋)에서 돌아가심.
83세(1689년 숙종 15년) 국문을 위해 귀경 길인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심.
학문적
계보 및
정치적
계보
남인의 사상적 종주는 영남학파의 퇴계 이황이다.
군주권의 강화를 통해 농민들의 이익을 보장하려는 개혁적견해를 나타냄
서인의 사상적 종주는 기호학파의 율곡 이이이다.
신권 중심의 정치운영을 통해 지주들의 권익을 옹호하려는 보수적 견해를 나타냄
효종대왕
관련
42세에서 47세까지 봉림대군의 사부로 6년여 동안 가르침.
효종이 임금이 된 후 동부승지로 특별히 임명
28세때 봉림대군의 사부로 6개월 동안 가르침
효종이 임금이 된 후 이조판서에 임명하였다.
예송논쟁
관련
(1차)
예송논쟁이란? 인조의 첫째 왕비는 인렬왕후 한씨로 소현, 봉림, 인평, 용성대군 등 4남을 낳고 인조 13년에 사망했고, 3년후 양주조씨와 재혼했다. 그녀가 장렬왕후 조씨이고 효종2년 자의대비
가 되었다.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대비가 아들인 효종의 국상 때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 제1차 예손논쟁이다.(1659년)
남인의 논객 윤휴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함 이어 미수허목이 3년복 주장, 현종1년4월고산 윤선도가 과격한 상소로 논쟁에 뛰어들다-삼사로 귀양
집권당인 서인쪽에서 1년복을 주장함, 송시열, 송준길이 허목의 이론을 반박-1차논쟁은 서인의 승리로 끝남.고산을 지원하는 사람 권시, 조경, 홍우원
최대의 정적관계인 두 사람의 유적이 보길도에 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 뿌리는 선조 21년(1589) 발생한 정여립의 난때 판관은 서인 정철이었는데, 이때 죽음을 당한 이발(李潑)은 윤선도의 조부 윤의중의 사위였다. 또한 효종의 장지를 수원으로 정하였다가 좌절되는 등 고산의 정치적 야망이 서인으로 인해 좌절되었다고 사료됨
 
  2차 예송 및 숙종과 우암의 충돌
 
    2차 예송이란?
 
 1674년(현종 15)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며느리인 인선왕후에 대한 자의대비(인조의 왕비)의 상복기간을 둘러싼 논란이다. 예조에서 9개월복으로 정하였으나 대구 유생 도신징이 1년복이라는 상소를 올려 시작되었다. 즉 효종과 효종비를 장자와 장자부로 대우하느냐. 차자와 차자부로 보느냐의 차이인 것이며, 나아가 왕통 계승에 관한 문제가 따르는 것으로 현종의 왕통에 대한 서인들의 정면 도전이었다.
 - 현종은 대노하여 남인의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고 승하하셨다.
    숙종의 등극
 열넷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 숙종은 예손논쟁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유업을 이어받음. 진주의 유생인 곽세건이 상소하여 우암이 예론을 그르친 자이니 벌주어야 한다는 상소였다-숙종이 옹호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동맹 휴학에 들어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합계하여 우암을 탄핵-숙종 즉위 4개월 만에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 명령을 내림(우암 67세)-남인 득세함-숙종 5년 5월 우암의 최상을 종묘에 고함.
 남인 탁남(허적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 청남(허목을 비롯한 강경파)으로 갈라졌음. 1680년(경신년, 경신환국) 숙종 6년 3월 허견의 난으로 서인이 재 집권함. 진정한 북벌론자 윤휴 숙종 6년 5월 사사됨. 숙종 6년 5월 우암의 귀양살이 풀림. 숙종 14년(1688) 10월에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아 원자로 정호하자 우암이(82세) 반대 상소를 올려 제주도로 귀양(백도리 바위에 시 남김)-사사됨. ※참고문헌 : 이덕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김영사.2002)
    고산 윤선도의 사후(死後)
1671년(현종12) 12월 윤고산께 직첩을 다시 주게 하였다.
1676년(숙종 2) 3월 윤고산의 상소를 불태우기를 청한 사람을 조사함.
1678년(숙종 4) 8월 손자 윤이석에게 6품직 이산 현감에 임명.
1679년(숙종 5) 8월 윤고산에게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내림.
1689년(숙종15) 6월 제주에 귀양가 있던 우암을 불러 정읍에서 賜死 명함.
1690년(숙종16) 호남 유생 유이성 등 160여 명의 상소로 서원건립을 명함.
1672년(영조 3) 왕의 특명으로 불천지위 되심. 사후 57년 만임.
1800년(정조24) 상왈 호(號)를 부르되 필히 윤고산(尹孤山) 3자를 부르게함.
출처 : 청해진『완도를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여우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