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이 산으로 간 까닭
신 병 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조선왕조실록』은 1대 태조로부터 25대 철종에 이르는 472년(1392-1863)간의 기록을 편년체로 서술한 조선왕조의 공식 국가기록이다. 정족산본 완질 분량의 경우 1,707권 1,187책(약 6,400만자)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으로서 조선시대의 정치·외교·경제·군사·법률·사상·생활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다.
사관의 독립성이 보장하기 위해, 국왕도 열람 못해
『조선왕조실록』은 역대 국왕의 사후에 전 왕대의 실록을 편찬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국왕이 사망하면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실록청에는 영의정 이하 정부의 주요 관리들이 영사(領事)·감사(監事)·수찬관·편수관·기사관 등의 직책을 맡아 실록 편찬을 공정하게 집행하였다. 실록청에서는 전임 사관들이 전왕대에 작성한 사초(史草)와, 시정기(時政記)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실록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시정기는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에서 시행한 업무들을 문서로 보고 받아 춘추관에서 그 중 중요사항을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관상감일기』, 『춘추관일기』, 『의정부등록』, 『내의원일기』, 『승정원일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시정기는 매년 책으로 편집하였으며, 보관된 시정기는 실록의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책은 편찬이 완료되면 국왕에게 바쳤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예외였다. 편찬의 완성만을 총재관이 국왕에게 보고한 후 춘추관에서 봉안 의식을 가진 후 궁궐 내의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에 보관하였다. 국왕의 열람을 허용하면, 실록 편찬의 임무를 담당한 사관의 독립성이 보장을 받지 못하고 사실(史實)이 왜곡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실록은 사초와 시정기를 주 자료로 활용했기 때문에 그 내용이 매우 풍부하다. 그야말로 ‘조선시대판 타입캡슐’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소중한 기록유산이 영원히 사라질 뻔한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국가 기록물을 철저히 보관하려는 시대정신이 이 위기를 극복하는 요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선조들의 혜안으로 조선후기 실록은 산으로 갔고, 그 결과 우리는 지금까지 실록의 원형을 그대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시대 편찬이 완료된 실록은 춘추관에서 실록을 봉안하는 의식을 치룬 후에 서울의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에 1부씩 보관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전주·성주 등 지방의 중심지에 분산 보관하였다. 고려시대에 1부의 실록만 만들었다가 완전히 사라진 뼈아픈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방의 중심지는 화재와 약탈 등 분실의 위험이 제기되었으며, 실제 중종 시대에는 비둘기를 잡으려다가 성주 사고가 화재를 당한 적도 있었다. 급기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주사고본의 실록을 제외한 모든 사고의 실록이 소실되면서, 사고를 험준한 산지에 보관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만 어렵사리 보존
1592년의 임진왜란은 교통과 인구가 밀집한 읍치에 소재한 사고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즉 왜적들의 주요 침입루트가 된 서울의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는 모두 병화의 피해를 입고 그 존재가 사라졌다. 다행히 전주사고본의 책들은 사고 참봉(參奉)인 오희길(吳希吉)과 전주 지역 유생인 손홍록(孫弘綠), 안의(安義)와 같은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내장산의 깊은 동굴까지 옮겨지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보존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사고가 지역 중심지에서 험준한 산 위로 올라간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 때문이었다. 여러 곳에 분산하여 보관함으로써 완전한 소실은 면했지만 교통이 편리한 지역은 전쟁이나, 화재, 도난의 우려가 커서 완벽하게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였던 것이다. 조선후기에 사고들이 산으로 간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당대인들이 관리하고 보존하기에는 훨씬 힘이 들지만 후대에까지 길이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 험준한 산지만을 골라 사고를 설치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광해군대 이후 사고는 5대 사고 체제로 운영되었다. 서울의 춘추관사고를 비롯하여 강화도의 마니산사고,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사고,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사고,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사고가 그것이다. 춘추관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를 지역별 안배를 한 후에 험준한 산지에 배치한 것이다. 그 후 묘향산사고는 후금(뒤의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여 적상산성이라는 천연의 요새로 둘러싸인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사고로 이전했다. 강화의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으로 크게 파손되고 1653년(효종 4) 화재가 일어나면서 1660년(현종 1)에 인근의 정족산사고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 지방의 4사고는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확정되었고 이 체제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한편 사고 주변에는 수호사찰을 배치하여 보다 안전하게 사고를 지키게 했다. 전등사(정족산 사고), 안국사(적상산 사고), 각화사(태백산 사고), 월정사(오대산 사고)가 각각 이러한 기능을 하였다. 조선후기에 그려진 지방지도에는 사고와 부속 건물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어서 기록물을 중시했던 조선시대의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귀중한 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의 분산보관과 이동의 역사
1910년 이후 일제 점령기 때 4대 사고의 실록들이 모두 조선총독부에 넘어가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후 정족산사고와 태백산사고의 실록은 경성제국대학도서관에,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이왕직(李王職) 소속의 도서관인 창경궁 장서각에, 오대산사고의 실록은 1913년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되었다. 1945년 해방이후 정족산에 보관된 실록은 경성제대를 거쳐 서울대학교로 옮겨졌고 현재는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보관하고 있다. 서울대에 있던 태백산본 실록은 1984년 국가기록원 부산지원으로 옮겨져 현재에도 이곳에 보관되어 잇다. 적상산본 실록은 6.25전쟁 때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후에 북한에서 이 책을 저본으로 한 번역본이 나온 것으로 보아 전쟁의 혼란기 때 북한에서 가져간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는 북한의 평양에 보관되어 있다.
오대산본 실록은 일본 동경제대에 보관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겨우 화를 면한 74책 중 27책이 경성제대로 돌아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2006년 동경대에 남아 있던 47책이 한국에 극적으로 반환되었다. 필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근무하던 시절 이 역사의 현장에 함께 하는 감격을 맛보았다. 역사 속에서만 존재할 줄 알았던 실록의 이동 상황이 바로 눈앞에 재현된 사실에 무척이나 놀란 경험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정족산본 실록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유일하게 보존된 1부의 전주사고본의 원본 실록(태조실록~명종실록)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조선전기에 편찬된 실록의 원형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기록유산이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까지 실록의 실물을 접할 수 있는 것에는 조선후기에 사고를 가장 안전한 곳에 배치한 선인들의 지혜와 노력이 숨어있었음을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저서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7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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